The Path is Clear

동네 속 공원

 

토요일 오전엔 둘째 아이를 테니스장에 내려주고 (이노무 레슨비...허리가 휠 지경 ^^;) 한 시간동안 산책을 한다.

동네 길을 걷고 있는데 (Hillside Crescent) 길 넘어 집 뒷쪽이 완전히 숲이 아닌가.  9글맵을 시전해보니 Edna Hunt Sanctuary.

마침 입구가 눈 앞에 보인다.

딱히 정비된 길은 없고 그냥 잔디밭이네...겨울날의 오전이라 햇볕이 아직 이슬을 훔쳐가지 않았다.  신발이 젖는다.

예쁜 노란 꽃.  직접 보면 눈에 한 가득.

세워서도 한 번 찍어보고

Sanctuary 곳곳에 벤치가 놓여있다. 이런건 참 분위기 있어 보여.

잘 안보이는데 저 뒤 나무 넘어는 집들.  공원을 뒷마당으로 삼은 운 좋은 위치.

햇볕이 머리 위로 들면 이곳에 앉아 뭐라도 하나 까먹으면서 책 읽어도 좋겠다.

약간 오르막. 여길 지나가면 Yaraan Ave.가 나온다.

이제 아이를 픽업하러 부지런히 돌아가야지... ^^

위치는...

 

 

첫 번째 조언은 읽으면 읽을수록 공감이 가는 조언이다.  나는 내 아이와 있을 때 이 조언을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저 아빠에게 예의만 조금 지켜주면 기분이 상하지 않을텐데 하는 그런 생각.  물론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리라.  내가 내 아이에게 조금 예의를 갖춰 대해준다면 그 녀석은 어쩌면 몇 배로 보답을 해 올지 모르겠으니까.  그렇다면 세상살이에도 많이 적용이 되지 않을까.  내 주위 사람에게 그저 예의만 지켜 주어도 배고플때 어디라도 가서 밥 한 끼 얻어먹는데 문제가 없으리라.

 

(( 상관관계로 인한 논리 전개가 아닌 인과관계에 기인한 논리 전개 연습 ))

   - 객관적인 시점에서 뉴스와 이슈 판단하기


FACT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였다.


ISSUE: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외교적 이슈보다는 문대통령이 중국에서 홀대 당했다 그래서 혼(자)밥을 먹었다 라는 이야기들이 더 회자되고 있다.


OPINION: 이것이 보수 언론의 frame이냐 아니냐?


1) 만찬은 한 번 뿐, 그런데 혼자 밥

   중국에서는 밥 같이 먹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아무리 대통령의 방문이 오래 전에 계획되고 모든 일정이 중국과의 협의하에 짜여졌다고 해도 3박 4일의 방문기간동안 만찬이 한 번이라는 점은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를 어떤 사람들은 홀대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의 서민식당에서 그들의 메뉴를 먹었다는 사실 자체는 혼밥의 논란 이전에 마찬가지로 목적이 있는 혼밥 이벤트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본다.

   어차피 중국의 주요인사들과 매끼 같이할 수는 없었고 그런 와중에 뭔가 (중국인들이 보기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려면 문대통령의 혼밥 이벤트는 의도 면에서는 좋은 판단이었다고 읽어줘야 된다 (된다고 생각한다).  즉 홀대는 맞고 혼밥은 나름의 이벤트였다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것을 물고 이슈화 시키는 것은 역시 보수 언론의 프레임.

   

2) 그렇다면 외교적 성과는 무엇인가?

   THAAD 문제 해결?

   중국의 경제 보복문제 해결?

   향후 대중 관계에 대한 물꼬를 텄다.

   아직 외교적 성과를 논하기에는 이르다.  앞으로 한중관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니터링 해 봐야 한다.  어떤 사람은 한국이 미국에 등을 돌리고 중국에게 읍소하였다 해서 한반도의 전쟁 위험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높다는 시각이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0&aid=0003115681&sid1=001

中 전문가들 “한반도 전쟁 위험 수십년내 최고” (동아일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3&aid=0003338494&sid1=001

중국 군사전문가 "당장 오늘밤 한반도서 전쟁 날 수도" (조선일보)

일단 모두 보수성향의 언론이라는 점은 인정하자.

    이 전쟁은 물론 남한 대 북한의 전쟁은 아닐 것이다.  미/일 대 중국 또는 미/일 대 북한의 전쟁일 확률이 높다.

    나는 '홀대받는'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의 편에 서건 아니면 막말로 홀대받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숙였건 그의 행보가 한반도의 전쟁위기를 올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진보건 보수건 정권을 잡기 위해 국민들에게 보여주기식 쇼를 하는 것은 어느정도 감안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미국이나 중국이나 상황에 따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지 않거나 배신의 이미지가 있거나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본다.  나라가 뭐 힘이 있어야 제 목소리를 내지.  외교적 성과는 좀 더 두고봐야 되겠지만 홀대 받는다고 해서 가서 좀 비벼보는 액션은 필요하지 않을까?


3) 경제문제때문에 안보를 양보하였다는 시각

   이것은 복잡하다.  중국은 교역액 측면에서 우리나라 제 1의 고객이다.  하지만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 때문에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THAAD를 다시 걷어내는 일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대통령 5년의 임기동안 어떻게든 더이상의 배치를 막아내는 건 어떨지 몰라도 그 다음까지 보기에는 우리나라 정권의 연속성은 너무 떨어지는 편이다.  좋고 나쁘고를 따라서 4대강, 자원외교, 승마지원등만 봐도 그렇다.  부디 문재인 정부가 이명박그네 정부같이 사리사욕 채우는데만 혈안이 되지 않길 바래본다.


조선일보, 동아일보만 읽다보면 지금 나라는 엉망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김어준의 뉴스공장만 주구장창 듣고 앉았다보면 나라는 잘 돌아가고 있는데 전 정권의 적폐와 보수 언론만이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 거다.  이럴 때일 수록 자신의 시각을 가지고 스탠스를 취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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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글을 쓰면서 (또는 논평, 또는 판단) 어디까지 객관적이 될 수 있는가?

   - 객관적으로 계속 나가다보면 오히려 나의 생각에 반대되는 결론을 내기가 쉽다.

     왜냐하면 주변의 시각을 의식하여 나의 생각이 마치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살인 혐의를 가지고 재판을 받고 있을 경우,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판사는 피고에게 유죄의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아무리 피고가 '객관적으로'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판사의 판결은 보편적으로 정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이 화두.

** 초벌번역이라 매우 거칩니다.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


Chapter 2


세상 Earth


모든 세대에 걸쳐 인간의 마음을 구름처럼 뒤덮고 있는 어둠의 음모dark conspiracy가 있다고하자.  이 음모야말로 악의 현현incarnation이며 인간의 감성, 일, 생각, 발언 등의 상당한 부분을 조종control하고 있다.  이것은 수백 수천만의 죽음과 여태까지 살았던 거의 모든 인류의 노예화slavery에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딱 한개의 원칙principle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 바로 당신이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 이 책은 당신에게 세상이 정말 어떤 곳인지를 볼 수 있게하는 시각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렇게 한 번, 그리고 영원히 앎으로 인해 어둠의 음모는 강해지지 않고 약화되며 악은 더 이상 자라나지 않고 죽게 될 것이다.


원리와 법 Principle versus law

악이 사람들을 어떻게 조종하는지 알기 위해 원리과 법이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원리란 자유를 만드는 진리이다.  법은 노예를 만드는 거짓이다.


원리는 현실을 반영한다.  원리는 당신이 당신의 세계를 올바르게 세울 수 있게 도와주는 지식이다.  당신이 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이 하는 모든 것에서 원리를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배우는 모든 진실된 것true thing은 모두 원리이다. 당신 손의 움직임이라던가 어떤 음식이 맛이 있는지, 수학과 친구에 대한 연민 등 이 모든 것들이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들이다.


법은 인공적인 개념으로써 악인evil men들에 의해서 사람들의 생각과 해석understanding을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법은 권위authority라는 탈을 쓰고 뒤에 숨에 마치 법이 원리인냥 가장한다.  사람들이 법을 원리와 혼동하기 시작하게되면 그들의 자유는 제한되고 만다.  사람들이 진리를 권위의 개념과 혼동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능력과 지혜는 작아지게 된다.  이 것이 바로 법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열역학thermodynamics에서 원리의 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액체는 기체보다 차갑다.  이것이 하나의 원리이다.  이것이 원리이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를 제한하지 않고 반대로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할 수 있게 한다.  즉, 이 원리를 이용해 기체와 액체사이에서 한 물질을 응축시키거나 팽창시켜서 냉장고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원리를 가지고 우리는 이해를 더 높히고 힘을 더 가질 수 있게 된다.  원리는 자유함을 만들어내는 진리이다.


반대로 법의 일례로 충성심royalty에 대한 문화를 들 수 있다.  평민은 왕에대해 경의hommage를 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법이다.  이것이 법이기 때문에 법은 자유를 파괴하고 노예를 만들어낸다.  이 법 아래서 개인의 생각과 발언, 그리고 행동은 무시당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평민들은 자신들이 왕보다 무익worth less하다고 믿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원리와는 정반대로 법에는 진리가 없음을 주목하기 바란다.  왕에게 무례disrespect하는게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그렇게 하게 되면 법을 깨뜨리는게 되고 만다.  법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법은 반드시 강제적으로 강요되어야만 한다.  법은 그것이 거짓이기 때문에 자유를 파괴한다.  원리는 그 반대로 그 자체가 지식knowledge이기 때문에 자유를 만들어낸다.


그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 악이다.


단순함 Simplicity

세상은 보이는 것 보다 단순하다.


복잡함이라는 것은 우리 문화와 정치와 경제등의 모든 면에서 발견된다.  사람들은 매일 우리 세계의 새 개념과 파생물spin, 새 관점또는 새 증상등을 매일 맞이하게 된다.  이중 다수의 개념은 원리를 왜곡perversion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특정한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고안engineer된 것들이다.


악한 사회들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파괴하기 위해 방법들을 고안한다.  이러한 예를 역사에서 찾아본다면 사회주의socialism, 파시즘, 인종차별주의racism, 공산주의communism, 민주주의democracy, 계급투쟁class warfare, 정치적 교정political correctness, 도덕적 적절성propriety, 체면decency, 충성royalty, 테러리즘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개념들은 하나할 것 없이 모두 완전히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 진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노예화된 피해자들의 마음을 혼란시키기위한 도구인 것이다.


당신은 당신 주위 세계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당신의 지성은 제한받지 않는다. 당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뒤틀고 복잡하게 만들어버림으로해서 악인들은 당신을 조종control하는 것이다.  악은 당신이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고 믿게끔 만들기를 원한다.  당신이 당신 자신의 가치가 얼마만큼인지를 알게될 때, 악은 실패하게 될 것이다.


지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 두가지의 원리를 관련지을 수 있다.  그 첫째가 단순함simplicity이다.  단순함의 원리는 지성은 진리를 인지한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진리라도 그것이 순수한 형태로 제시된다면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당신이 배울 수 없는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지성은 진리를 인지한다는 단순함의 원리이다.


두 번재의 원리는 불명료화obfuscation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불명료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명료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진실을 감추기위해 잘못된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때때로 이것은 원 진리의 본질 위에 단순히 개념하나를 덧붙힘으로써 그것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심지어는 완전히 적절하다고 보여지는 개념들도 단순한 진리를 덮어버리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불명료화는 악에 의해 사용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하게 만든다.  불명료화는 원리를 비비꼬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원리를 배울 수 없도록 만든다.  악이 불명료화를 사용하여 당신이 지혜를 얻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당신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문화라는 것은 인위적으로 만든 복잡함에 사람들이 촛점을 맞추게 되면 진실을 별로 발견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어린이들이 자라나면서 배우게 되는 복잡해 보이는 사상들은 원래 기본적이고 단순한 원리들이다.  한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이 보여졌던 것이 한 번 이해하고 나면 굉장해지는 때가 있지 않은가.  지혜wisdom을 얻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지혜를 가지고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이 자신의 열등감에 대한 관념을 벗어버릴 때 당신의 지식에 대한 탐구가 쉬워질 것이다.  악은 불명료함을 이용해 사람들이 열등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전혀 열등하지 않다.  또한 어떤 사상에 대해서도 전혀 열등하지 않은 존재다.  당신은 무한한 가지를 지닌 사람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Who you are

한 사람의 인간으로써 당신은 매우 특별하다.  당신은 무기물mineral도 아니고 지구상의 어떤 식물이나 동물과도 다른 존재다.  그 어느 것도 당신이 가진 지성과 같은 능력이 없다.  그 어느 것도 꿈을 성취하기 위한 완벽하고 전체적인 아먕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 어느 것도 당신이 소유한 지식을 향한 욕구나 갈증이 없다.  당신은 인간이다.


당신의 본성에 한계란 없다.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나 행복을 느끼는 것에 대한 능력의 한계란 없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써 당신 자신의 의지가 아닌 그 어떤 것에도 복종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배우고 성장하는데 허가가 필요하지도, 호의나 면허가 필요하지도 않다.  당신이 열망하는 것은 당신의 것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자신의 삶에서 행복을 찾는다.  그리고 가장 일반적이고 깊은 욕구는 사랑과 가족의 건강등이다.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이 안전과 형화 그리고 당신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번영을 증진시킨다.  마음속에서 그렇게 열망함으로 인해 이러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당신의 능력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믿음faith이라 할 수 있다.  믿음을 바탕으로 당신은 삶의 한 걸음 한 걸음 마다 기쁨joy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믿음 Faith

믿음이라는 것은 용기이다.  진리를 위해 생각들을 시험하는 용기이다.  믿음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어떤 생각들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믿음이 있어야 사람들은 원리를 배울 수 있다.


사람들은 원리를 시험하는데 믿음을 사용한다.  우리는 종종 실패하지만 또한 우리는 늘 배움을 얻는다.


바위투성이의 땅을 걷는다고 상상해보자.  어쩌면 당신은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땅을 예상했는지 모른다.  만일 탄탄한 땅을 예상했다고 한다면 당신은 움직임을 발견하고 넘어지게 될 지도 모른다.  당신이 생각했던 것들이 틀렸을 때 당신의 테스트는 실패한다.  당신은 지성을 갖고 있으므로 이를 통해 당신은 걷기의 원리를 좀 더 잘 이해해 생각을 고쳐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형이 험한 곳에서는 중심을 잘 잡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새로운 이해를 테스트하기 위해 믿음을 사용하고 드디어 바위투성이의 땅을 성공적으로 그리고 재빨리 건널 수 있게 된다.  당신은 원리를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원리들을 행동으로 옮길 때 마다 인간은 힘과 기쁨과 신나는 느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찾는 것은 지성이 현실화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면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신발끈을 묶는 법을 배웠다고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일이라던가 학생이 수학의 이해방식을 터득하는 일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다툼을 해결하는 일등, 이런 것들이 신념을 가지고 원리를 테스트함에 따라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믿음을 원리에 대해 응용하게되면 지혜를 얻게 된다.


자유가 필요하다.  파괴당한 자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든다.  자유를 파괴당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들이 이해한 원리를 확인할 수 없게 된다.  우리에게 일보 전진할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배울 수도 없고 성장할 수도 없다.  사랑, 번영 그리고 지식같은 것들은 모두 자유가 있을때만이 오직 가능한 것이다.  자유는 모든것을 좋게 만든다.


인간으로써 당신이 필요로하는 자유의 정도는 무한한 것이어야 한다.  자유는 인간의 무한한 가치에 다름 아니다.  만약 악이 당신 인생의 어느 영역의 자유라도 파괴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기쁨을 제한할 수 있게 된다.


위험 Danger

당신의 자유를 파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당신을 콘트롤하기 원하고 따라서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없게 된다.  당신을 콘트롤하기 위해서 그들은 당신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지배, 권위 등으로 부터의)자유liberty를 빼앗기 위해 강압력force을 사용한다.


당신은 악인들의 기량이나 잔인함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악은 돈을 몰수하려고 할 것이며 선virtue을 파괴하고 피를 흘리길 원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하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 창조해내려고 하지 파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악인들은 반드시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은 극도로 위험하다.


그들은 권위(또는 권력)authority라고 불리운다.


권위(또는 권력) Authority

당신의 삶을 정당하게 지배할 수 있는 권위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에 태어나 오로지 당신 혼자만이 당신의 눈과 귀, 혀와 손 그리고 마음을 콘트롤 할 수 있다.  당신이나 당신의 능력을 없앨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는 모든 권위는 기만deceit이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은 당신이며 따라서 당신만이 당신 삶의 자유행동권free agency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삶은 자유liberty다.  이 세상에 자유와 믿음이 있어야 당신은 배울 수 있게 되고 어떠한 것이라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나 육신 또는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이라도 권위에게 내어 놓으라고 하는 그 어떤 사람은 바로 악이다.


당신의 자유의지로 선택을 내린다는 것은 악이 아님을 이해하기 바란다.  만일 그것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기꺼이 내어놓은 것이라면 희생이라고 해서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희생하지 않을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은 희생은 노예나 다름없는 것이 된다.  권위는 항상 강압적으로 사람들에게 요구한다.  권위는 결코 허가를 묻지 않는다.


불투명함 Obscured

가장 단순한 권위라고 하면 좀도둑을 예로 들 수 있다.  좀도둑들은 당신이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들을 갈취하거나 몰래 빼앗는다.  그들은 돈을, 강간으로 선을, 살인으로 생명을 빼앗는다.  그러한 행위를 통해 그들은 당신에게 당신의 가치는 그들에 비해 보잘것 없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들 권위의 도구는 폭력이다.


당신의 일상생활에 훨씬 더 강력한 다른 종류의 권위가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극단적으로 더 위험하고 더욱 더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더욱 교묘하다.  그들은 왜곡된 생각을 당신에게 주입하여 당신이 능력이 없거나 자유롭게 살 가치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권위라고 하는 것들은 당신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인생을 관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냉담하게 당신의 가치를 무시하면서 당신은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기초로 움직이도록 강요당한다.  이것이 위험한 진짜 이유는 이러한 명령 또는 강요가 선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문화culture라고 알고 있다.


당신은 그러한 속임수가 당신이 가치를 두고 있는 모든 것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일 어떤 것이 당신에게 가치있는 것이라면 당신은 누군가가 어느곳에서건 그것을 빼앗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모양새가 일반적인 도둑과도 같은 악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정교한 문화의 방법론은 일반적으로 상당히 그것도 아주 커다란 위력을 지니고 있다.


악 Evil

악이란 자유를 파괴하는 것.


더 쉽게 얘기할 수는 없다.  당신이 어느 곳을 보더라도 악의 속임수obfuscation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악의 성질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수많은 견해들이 있다. 악이 만들어낸 잘못된 생각들은 모두 당신으로부터 진실을 감추려고 한다.


악은 어둠이 아니며 그것은 또한 알려지지 않은 위협도 아니다.  악은 인간의 어떤 신비스러운 심리상태도 아니고 우리안에 내재되어 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초자연적이지 않은 확실히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다.


모든 법칙principle과 같이 악의 법칙도 간단하다.  악은 자유를 파괴하는 것.  자유로울 때 당신은 세상에 영광과 평화, 번영과 기쁨을 이룰 수 있다.  당신 주위에서 이러한 것들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이룬 이러한 것들을 좋아할 것이다.


악은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  악은 무력force, 강요compulsion, 세금tax, 폭력violence, 도둑질theft, 불신임censure 그리고 정치politics라는 말 속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것들엔 기쁨joy이 없음을 주목하라.  인간성에 도움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통제 Control

악은 당신을 지배하려고 시시탐탐 노리고 있다.  악은 당신을 노예로 만들고 싶어한다.


진정한 "노예slavery"라는 것을 고려함에 있어 사실 한 가지 형태의 노예만이 있을 뿐이다.  미국에서의 아프리카 노예들은 노동과 다른 사람들의 이득을 위해 일할것을 강요받았다.  그들의 삶은 대부분이 주인의 이익을 위해 통제되었고 그들은 단지 매우 제한된 자유만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독특한 전통과 가족을 꾸릴 수 있기도 했었는데 그들위에 닥친 압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 속에 기쁨을 만들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의 그들 삶의 일부분만을 통제당했다고해서 그들을 자유롭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한 사람의 인간은 얼마만큼의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인가?  우리의 자유가 얼마만큼 파괴되어야 비로서 그것을 악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인가?


노예는 통합적인 개념concept of totality이 아니다.  노예는 인간의 자유가 파괴된 그 어느곳이던 존재하는 것이다.  도적질과 약자를 괴롭히는 일bullying은 노예상태와 같다.  역사적으로 아프리카 출신들과 유대인 그리고 많은 수의 사람들이 평생동안 노예상태를 경험했다.  살인murder이야말로 궁극적인 노예상태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삶 속에서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에서부터 노예상태는 중단되기 시작한다.


당신의 마음과 움직임과 말하는 것을 제한하는 그 어떤 것도 악이다.  노예상태는 부분적으로건 전체적으로건 자유가 파괴된 모든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악은 당신이나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이 아무 도움이 안되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도록 강요한다.  문화와 법률은 공공의 번영과 선이라는 이름의 저항하기 힘든 힘으로 사람들을 연습시킨다.  그들은 자유를 파괴하고 안간의 삶을 어떤 사람들의 통제하에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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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벌번역이라 매우 거칩니다.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


Chapter 1

자유 Freedom


자유freedom를 인간이 가진 무한한 가치라고 정의하면 악evil은 그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악이 사람들에게 가르치고자하는 모든 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은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단순함 Simple

진리truth는 언제나 단순하다.  모든 사람들은 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진리를 인지하게 된다.  인위적으로 복잡한 개념ideas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악의 본질이다.  악은 자기가 없애버리고자 하는 자유를 은폐하거나 불명료obfuscation하게 만들기위해 복잡한 개념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 복잡함complexities과 공포fears를 없애버린다면 당신은 간결plain하고 아름다운 진리를 찾게 될 것이다.  이 진리야 말로 당신이 지닌 가치의 본질이다.


사람의 가치 Value of man

자유가 무엇인지 이해한다는 것은 한 개인의 가치를 이해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악이 오로지 원하는  것은 당신의 가치를 왜곡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악한 사람들이 고안해낸 모든 종류의 권위authority는 당신의 가치를 왜곡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당신 자신의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배와 권위로부터의 자유liberty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악 Evil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악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악은 사람들의 가치를 부인함으로써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결정을 내리는 기회와 아울러 배움과 이해를 통해 강하게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한다.


자유 Freedom

악이 개인의 가치를 파괴하거나 은폐하려는데 반해 자유는 인간이 가진 최대한의 잠재력과 궁극의 가치를 보려준다.  자유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사랑하고 질병을 치유하며 배고픔을 없애고 노동에서 한숨돌리며 평화 속에서 살아왔다.  자유로움으로 인해 비로소 행복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자유는 악에대해 정확히 반대이다.


당신 You

이 책은 오직 문화culture와 법law의 개념을 파괴하기 위해 씌여졌다.  이 책의 교훈lesson은 간단하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당신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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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공

2015. 7. 30. 19:45

묵공 墨攻

원작 사케미 켄이치

그림 모리 히데키

서현아 옮김 (시공사, 2014)


8권짜리 만화책으로 일본 소설가의 원작에 만화가의 작화로 약 2천 3백여년 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묵자 혁리의 모험담을 그리고 있다.  책의 설명에 의하면 전국 시대에 반전론자들로 墨子(기원전 480~390년 경)의 뜻을 이어받은 이들이며 전쟁이 살인행위이며 사람으로써 최대의 불의임을 주장하며 묵자 교단은 성읍 방어전에 한정되어 오로지 '지키는 것'에 제한된 무보수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묵가도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원래의 이상이 퇴색되고 야욕을 따르는 자들이 점점 더 생겨나게 되는데...


주인공인 혁리革離는 원칙을 고수하는 수성守城의 전문가로 묵가를 퇴색시킨 설병과 대립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 없는 자가 원칙을 고수하다보면 언제나 충돌이 일어나게 마련.  아니지, 원칙을 고수하는 자는 언제나 권력에서 먼 그렇지만 실력을 갖춘 사람일 때가 대부분이지.  하여튼 이 (만화)책은 그러한 혁리의 이야기다.  2천년 전이나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별로 다른 점이 없는 것 같다.  비슷한 일이 지금도, 그것도 우리나라 땅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비단 정치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종교계도 그다지 정치판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만화에서는 묵가라는 사상이 어쩔 때는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종교집단같이 보이기도 한다.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 어느정도 힘이 갖춰졌을 때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사이비같은...  물론 묵가 사상이 종교이며 사이비라는 말은 아니다.  포인트는 사람의 역사에서 대부분의 종교나 사상이 시간이 흘러가 계승되면서 본래의 뜻이 왜곡되고 변질되는 일이 다반사라는 것일 뿐이다.  아무리 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학생운동에 독재정치타도를 외쳤다고 하더라도 나이를 먹어 어떻게든 정치를 시작하고 과거의 이력을 발판삼아 금배지를 한 번 달기 시작하면 예전과 같은 원칙에 충실한 진보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주변과 동화되어 별 다를 바 없는 행보를 걷는 그런 사람들.


나는 개인적으로 돌아가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던가 하고 있지는 않지만 만일 세간에 알려진 모습이 그의 본 모습 그대로라면 나는 이 만화의 주인공 혁리와 고 노무현 대통령을 비교하고 싶다.  최대한 원칙에 충실하려 했던 그의 모습을 말이다.  공격하기보단 방어 위주로, 굽히기보단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충실했던 모습.  이렇게 주제넘은 비교를 한다면 고인에게 누가 되려나.


만화는 그렇게 혁리의 불굴의 정신을 끝까지 쭉 보여주다가 뜬금없는 결말로 마쳐버린다.  뭐 일본의 미화나 그런것으로 보기는 좀 그래도 혁리가 이상향으로 선택한 (혹은 선택된) 곳이 일본이라는 설정.  아무래도 일본의 역사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비해 미천(?)하다보니 원작자의 상상이 좀 멀리 나간 것 같기도 하다는.  그래도 마지막 몇 장, 그냥 그러려니 애교로 봐줬다. 왜냐면 그 전까지의 내용이 상당히 재미있고 흥미진진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묵공은 끝이 나고 이 여덟권은 우리 애들이 좀 더 클 때까지 종이 상자 속으로 사라져 줘야겠다.  자칫하다 애들이 펼쳐보다가 목 잘리고 피흘리는 장면이 떡하니 나와버리면 좀 곤란하니까.  아마 10년쯤은 빛을 보기 힘들 것 같은데...과연...어떻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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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연애 (2014)

영화2015. 2. 13. 15:08

오늘의 연애 (2014) / 박진표 감독


새로운 것 하나도 없는 로맨틱 코미디.  여자는 다분히 이기적이고 남자는 오매불망 순애보, 뻔히 예상되는 결말.  게다가 여주인공의 매력이 (내겐) 별로 느껴지지 않아서 남주인공의 집착(!)이 오히려 안타까웠다.  너무 억지스러운 줄거리가 아니었나 싶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는 것과 아니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는 것과 무엇이 최선인지는 사람마다 다른 것이겠지만 (물론 양쪽이 다 그렇다면 그것이 최선) 나이가 좀 든 남자로 지금은 어쩐지 나를 많이 사랑해주는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은 생각이다.  나도 참 이기적이구만.  하지만 사랑은 하는 사람의 행복이 크겠지...  


시간때우기용 여성관객을 노린 로맨틱 코미디 영화.




The Beatles의 And I Love 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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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qualizer (2014)

영화2014. 12. 14. 09:59

The Equalizer (2014) / Antoine Fuqua 감독


오디오에 있는 equalizer가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마도 어떤 사건 후 은퇴한 전직 요원이 '차카게' 살고 있는데 역시나 우연찮게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 결국 끝을 본다는...  영화끝까지 아무도 리처드(Denzel Washington 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또는 무엇이었는지) 밝히지 않으면서 관객들에게 '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식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한 후 쉽게쉽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사실 탐 크루즈의 <잭 리쳐>도 그렇고 책이 아니고 시리즈가 아닌 이상 인물의 히스토리를 깔끔하게 밝히기는 어렵긴하다마는 이 뻔하고 뻔한 이야기의 흐름을 어쩐지 나름 즐기면서 영화를 봤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랫만에 이런 영활 봐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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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나의 신부 (2014) / 임찬상 감독


1990년의 이명세 감독, 박중훈, 최진실 주연의 동명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조정석과 신민아를 데리고 리메이크.

이 영화 보고있으려니까 새삼스럽게 외로워진다.  나도 와이프가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예전에 분명히 보긴 봤던 원작에 대해서는 별로 기억이 없다.  느낌에 박중훈은 조정석보다 좀 더 능글맞고 뻔뻔하지 않았었나 하는 것과 최진실은 좀 더 까칠했던가하는 것.  리메이크한 본 영화는 정신없이 몰입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분명 중간중간 지루하고 맥빠지는 시간들이 있었다.  아마 이야기가 쭉 이어지지 않고 에피소드 형식으로 나뉘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감독이 알려주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영화적으로 (영화적으로라는 말은 영화스럽게도라고 바꿔도 됨) 잘 어울리는, 일부 관객의 마음을 설레이게(?) 만들 수 있는 장면이었는데 아무리 원작에 있었던 에피소드라고 해도 집들이에 신부의 노래는 너무 식상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좋은 점과 별로인 점이 마구 뒤섞여 버리니 영화가 매끄럽지 않고 들쑥날쑥 오리혀 지루하게 진행된 느낌이 짙다. 반면에 조정석의 연기는 무척 자연스럽게 보였다.  오히려 신민아보다 조정석이 그의 연기력으로 인해 더 빛나는 영화가 아닌가 싶다.


<건축학 개론>의 조연에서 이제 주연의 자리로 오른 조정석의 다음 행보가 부디 그의 연기력을 잘 끌어낼 수 있는 작품이길 바란다.  그리고 신민아는 아무래도 이런 역할, 그러니까 평범한 새신부같은 것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녀는 뭔가 돌파구가 필요할 듯.  전작 <경주>에서의 분위기는 참 좋았는데.  그래도 역시 오래 전의 <고고 70>에서의 신민아가 아직까진 제일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물론 본인의 개인적인 생각임.


결론내리면, 좀 뭔가 많이 아쉬운, 반짝하는 순간이 있긴하나 그냥 몇 번 그러고 마는, 봐도 안 봐도 별 상관 없는 영화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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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ovember Man (2014)

영화2014. 10. 17. 20:50

The November Man (2014) / Roger Donaldson 감독


Olga Kurylenko는 예쁘고 Pierce Brosnan은 이제 늙으셔서 쫌...  마치 007이었던 시절을 추억하듯이 안타까운 모습을 봤다.  한 번의 흘낏 훓어보는 것 만으로도 상황이 다 파악되는 첩보원중에 첩보원이요 내면의 따뜻함을 외면의 차가움으로 승화(?)시키는 배려심까지.  노벰버 맨이라는 닉네임은 그가 지나간 곳은 남아나는 곳이 없다 하여 붙혀진 것이라는데 그게 정말 11월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극동아시아 출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는...  영화가 끝난 후 얼핏 보니 피어스 브로스넌이 직접 제작에도 참여한 것 같던데 약간은 무리수를 두신 것 같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는...  그래도 <Lucy>보다는 재미있다는...


그냥 뜬금없는 뮤직 클립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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